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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하나뿐인 딸, 이 시아
“우리 사랑스런 딸,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너란다.”
혜선의 딸인 시아는 그랜드 필드의 정치외교학과 재학생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니지만, 소심한 성격과 외국이라는 환경으로 인해 좁은 인간관계를 지녔다.
혜선은 딸에게 한에서 정도가 심할 정도로 극성스럽다. 주책맞게 딸 자랑을 늘어놓는 게 한두 번이 아니며 주변인들은 그녀의 딸 자랑에 귀에 딱지가 생길 지경이라고 한다.
홀로 딸을 정성껏 키웠지만, 아버지의 부재로 시아는 일찍 성숙해졌다. 혜선은 일찍 철이 든 딸에 대해 고마움을 가진 만큼 미안함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딸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시아가 한국에 거주했을 때는 작은 일에도 사사건건 참견하고 걱정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유학을 간 이후에는 줄어들었지만 혜선은 여전히 딸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딸과 며칠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떤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안해진 혜선은 딸을 찾으러 그랜드 필드 대학에 직접 찾아오게 되었다.
남편과는 사별하였다.
“그이는… 뭐, 좋은 사람이었지.”
남편과는 선으로 만났다. 그는 꽤 괜찮은 직장의 사무직으로 성격이나 외모도 무난한 사람이었다. 당시 혜선은 혼기가 가득 찬 31살의 나이었기 때문에 애정보다는 주변인들의 권유로 결혼하게 된다. 결혼 3년 후 시아가 태어났고, 시아가 3살이 되었을 때 남편은 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남편이 돌아간 것에 슬픔도 있었지만 이렇게 떠나가 버린 것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는데, 이는 단순히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간호사에서 보건교사
“조금만 참으렴. 곧 괜찮아질 거란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해외긴급구호로 외국에 자주 파견되어 영어 실력도 수준급이다. 결혼하고 나서는 전업주부로 지내며 경력이 끊겼다.
사별한 후, 생활을 위해 일거리를 찾던 중 대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초등학교의 보건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두 가족이 살기에는 빠듯했지만, 딸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해주고 싶어 했다.
선생님으로서의 혜선
“오늘도 왔구나.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니니?”
보건교사의 업무는 생각보다 많다. 다친 학생들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건 수업 준비에, 각가지 예방 캠페인 준비 등의 업무가 있다. 혜선은 성실한 보건교사이고, 학생들에게도 항상 친절하고 다정하다.
원래부터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18년 동안 보건교사를 해왔으니 아이들을 다루는 데에 능숙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점심시간마다 보건실에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고, 자신을 보기 위해 일부러 꾀병 부리는 아이가 있는 것은 살짝 곤란해하고 있다.
기타
-이름 한자는 張惠善이다.
-1967년 음력 9월 4일생
-딸은 2001년 양력 7월 21일생, 20학번이다.
-3남 2녀 중 둘째다. 언니와는 굉장히 친하고 남동생들과도 그럭저럭 친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정정하시다.
-미국의 문화나 10대들 문화에는 익숙하지가 않다.
-업무를 하느라 컴퓨터는 익숙하지만 스마트폰은 메신저나 전화, 카메라정도만 쓸 줄 안다.
개인 소지품
-구급키트
보건실의 비품을 주문하면서 휴대용으로 몇 개 더 주문한 것들이 들어있다. 안에는 가위, 핀셋, 붕대, 거즈, 소독약, 반창고, 알콜스왑, 파스, 면봉, 원형 패치 등이 있다.
-스마트폰
2020년 모델로 2년째 쓰고 있지만 탑재된 기능의 절반도 활용할 줄 모른다. 갤러리에 딸 사진이나 직접 찍은 꽃 사진 정도만 있다.
-지갑
카드들과 달러는 물론 원화도 들어있다. 딸 이 시아의 증명사진도 끼워넣고 다닌다.
-여권
8년 전에 만들어둔 여권으로 기간이 2년 정도 남았다.
(나머지 짐은 숙소에 두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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